흰눈내릴 때(10)
2010. 1. 15일
<오후 4시에 받은 계시>
감독의 설명이 끝나자, 선수들이 황급히 자기 위치로 뛰어간다.
상대방의 골문 앞이다. 선수들이 우르르 감독 앞으로 몰려와서 설명을 듣는다. 잠시 감독에게 질문공세를 퍼붓던 선수들이, 감독의 설명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 자기 위치로 달려간다.
이때다. 황급히 자기 위치로 달려가는 선수들을 향해서, 감독이 다시 큰 소리로 외친다.
“후반전 다 끝나고, 이제 로스타임 일초 남았습니다!”
부랴부랴 자기 위치로 달려가던 선수 한명이, 이 말을 듣고는 급히 돌아서서 질문을 한다.
“예?”
“후반전 다 끝나고, 이제 로스타임이 일초 밖에 안 남았다고요!?”
“그렇습니다. 후반전 다 끝이고, 이제 일초 밖에 안 남았습니다.”
감독 역시 설명을 마치고 황급히 자기 위치로 달려 나가면서, 게임은 다시 진행이 된다.
“예수님!”
“일초밖에 안 남았다는 말이 무엇을 뜻합니까, 혹시 남북한 전쟁이, 축구시합으로 치자면 일초 밖에 안 남았다는 뜻입니까!?”
찬밥
한 스푼이 보인다. 전기밥솥 안에, 지난번에 먹고 남은 찬밥 한 스푼정도가 남아있는 것이 보인다.
맞다.
남북한 전쟁이 이제 일초 밖에 안 남았다는 뜻이다. 축구시합으로 치차면 일초, 음식으로 치자면 한 스푼 밖에 안 남았다는 뜻이다.
다시
한두 시간쯤 기도를 했다. 그런데, 아! 또 김치! 가 보인다. 김치가 보인다.
방문 앞에 놓인 쟁반위에 하얀 냄비를 올려놓고 김치를 썰고 있다. 찌개를 끓이기 위해서 가위로 김치를 적당하게 썰어 넣고 있다.
또
한 두 시간쯤 기도를 했다. 또 김치가 보인다. 큰일이다. 찬장대용으로 사용하는 냉장고 문을 열자마자, 반짝반짝 하얀 스테인리스로 된 큼직한 김치 통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반짝반짝 윤을 내고 있는 하얀 김치 통에, 김치가 하나 가득 들어 있다보니, 와, 이젠 김치를 바라만 보기에도 겁이 왈칵 난다.
또
잠시 기도를 했다. 또 김치다. 또 김치가 보인다. 이번에는 뒷문 곁에 놓여있는 작은 냄비에다 김치를 썰어 넣고 있다. 김치찌개를 끓이기 위해서 배추김치 두서너 잎을, 가위로 적당하게 삭각삭각 썰어 넣고 있다.
김치는
남북한 전쟁이 일어날 도화선이 될만한 사건이 터질 적마다, 단골로 나타나 보이던 환상이다. 김치가 보일 땐 꼭 불길한 사건이 터진다. 그런데 오늘은 이 무서운 김치가, 두세 차례나 보인다. 뭔가 가슴이 서늘하다. 무언가 곧 터질 징조다. 남북한 전쟁의 도화선이 될만한 사건이, 곧 터질 징조다.
다시
두서너 시간 기도를 했다. 이번에는 흰눈이 내리는 장면이 보인다. 매서운 칼바람을 타고, 유리창 너머로 희끗희끗 하얀 눈이 하늘을 가득 채워놓는다.
희끗희끗 흰눈이 날린다.
매서운 칼바람을 타고 흰눈이 날린다.
유리창 너머로 하늘 가득히
희끗 희끗 흰눈이 날린다.
유리창
너머로 흰눈이 곡예를 하듯 날린다. 희끗희끗 이리저리로 사정없이 휘날려 재낀다. 하늘이 뽀얗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하늘과 땅이 딱 닿은 가운데, 겨우 빠끔히 트인 공간사이로, 희끗희끗 하얀 눈이 곡예를 하듯 하늘을 빼곡히 채워놓는다.
위로부터 똑바로 내려오던 녀석은 어느새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그러는 사이에 왼쪽으로 내려오던 놈은 또 정반대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런데도 아직도 영문을 모르고 똑바로 내려오는 녀석, 그리고 오른쪽이고 왼쪽이고 방향감각도 없이, 이리저리 마구 지그재그로 묘기를 부리는 녀석들, 와, 이거 정말 하늘 교통이 말이 아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는 녀석은, 위로부터 똑바로 내려오는 녀석과 부닥치고, 위로부터 똑바로 내려오던 녀석은 어느새 방향을 틀고 우측으로 내려오는 녀석과 부닥치고, 그러는 사이에 이쪽저쪽에서 이놈과 저놈이 또 서로 부닥치고, 햐! 기가 막힌 곡예다. 기가 막힌 곡예다. 하늘 전체가 쇼윈도우가 되어버린다. 하늘과 땅이 통틀어서 피겨스케이트 장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흰눈이 퍼부어댈 땐, 웬만하면 유리창이라도 좀 열어놓고, 마음껏 퍼부어대는 흰눈을 좀 감상이라도 하고 싶지만, 이렇게 매섭게 칼바람이 불어재끼는 판에, 잠시라도 유리창을 열어본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희끗희끗 뿌옇게 바람을 타고 날리는 눈이다 보니, 정작 바닥에 쌓이는 눈은 얼마 안 된다. 다만 매서운 칼바람을 등에 없고, 날씨가 어찌나 사납게 엄포를 놓아재끼는지, 희끗희끗 곡예를 하는 기가 막힌 장면을, 유리창 너머로만 겨우 넘겨다 볼 수 있을 뿐이다.
남북한 전쟁이 이 겨울에 터진다는 것은, 이제 요지부동 기정사실이 되어버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