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눈내릴 때(3)
2010. 1. 7일
<오후 7시에 받은 계시>
하얗게 눈 덮인 뒷마당에
빵 부스러기 하나,
하얀 빵 부스러기만이,
주인 없는 뒷마당을 지키고 있다.
온통 뒷산이고 앞 들판이고, 하얗게 얼어붙은 눈 더미 위에,
누군가가 먹다버린 하얀 빵 부스러기 하나,
흰눈더미사이에 살짝 끼어서 집을 지킨다.
꽝꽝 얼어붙은 흰눈더미 사이에,
비닐에 쌓인 빵 부스러기 하나,
살짝 끼어서 집을 지킨다.
비닐봉지에 쌓여있는 빵 부스러기가 깨끗한 것으로 보아, 누군가 얼마 전에 먹던 부스러기인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먹다 남은 빵 부스러기 혼자서 뒷마당을 지키고 있을 뿐, 정작 방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가 없다. 주인도 없고, 문도 없다. 방문들마저 이리저리 다들 부서져 나가버리고 텅 텅 비어있을 뿐, 무엇 하나 제대로 남아있는 것이 없다.
방문들이 다들 부서져 나가다 보니, 겨울바람이 바닥에 쌓인 흰눈을 끌어않고, 앞뒤로 휘익~! 휘익~! 살벌하게 불어재낄 뿐이다.
“주인은 어디로 가고, 너 혼자서 눈 덮인 뒷마당을 지키고 있니!?”
“아직 빵 부스러기가 쌩쌩한 것을 보면, 얼마 전만 해도 주인이 함께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니!,”
“이 전쟁 통에 무엇인들 안전한 것이 있으랴 만은, 그래도 그 사이에, 무슨 일이 그렇게 크게 일어났기에, 무엇하나 제대로 남아있는 것이 없니,”
“그 사이에 이 땅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기에, 무엇하나 제대로 남아있는 것이 없니,”
“가엽다. 예쁘다. 귀엽다. 불쌍하다. 처량하다. 안됐다. 어떻게 하면 좋으니, 그래도 무얼 어떻게 해보아야지, 그래 너 혼자서 무얼 어떻게 해볼 수가 있니?”
“불쌍하다. 한참 어리광을 부릴 나이인데,”
여기는 목장이다. 수백 평짜리 비닐하우스 3동을 지어놓고, 젖소 50~60마리를 기르던 꾀 큰 목장이다. 마당에 최신형 트랙터 1억짜리가 한대, 좀 구형 트랙터 5,000만 원짜리가 한대, 그리고 봉고, 승용차, 경운기에다 각종 농기구들이 즐비하게 놓여있는 것만 보아도, 이 목장이 얼마나 큰 목장인지 한 눈에 알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 많은 젖소들이 다들 어디로 가고, 송아지 한 마리, 송아지 한 마리만이, 허물어진 축사 곁에 벌벌 떨고 서 있을 뿐이다. 아직 한참 어리광을 부릴 나이다. 아직은 엄마 엄마 하고 어미 곁을 졸졸 따라다닐 나이다. 어미 곁을 떠나서는 잠시도 견디어 내지 못할 나이의 송아지다.
앳되고, 귀엽고, 철없고, 불쌍하기만 한 송아지다. 그런데 혼자다. 혼자다.
송아지뿐이다. 그 외엔 아무도 없다. 그 많은 어미 젖소들도, 목장의 주인아저씨도, 인자한 주인아주머니도,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 학생들 할 것 없이, 사람의 그림자라곤 찾아보려야 볼 수가 없다. 없다. 보이지를 않는다. 텅 빈 집뿐이다. 텅 빈 축사뿐이다. 그 부요하던 목장이 텅 비어있는 체, 처량하게 송아지 한 마리가 영문을 모른 체 멍하니 서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날씨가 추워서 걱정이다.
“이 겨울에, 이 추운 겨울에 무얼 좀 먹어야 될 텐데, 이 전쟁 통에, 네 혼자서 그래 어떻게 무얼 만들어 먹을 수가 있니!?”
“이 흰눈이 덮인 벌판에서, 그래 네 혼자 어떻게 살아남을 수가 있니!?”
“쯧쯧!”
“어쩌다가, 야, 어쩌다가 그랬어, 이 추운 겨울에, 이렇게 길 한 복판에 쓰러져 있으면 어떻게 하니, 잠시도 쉬지 않고 쉴 새 없이 자동차들이 쌩쌩 거리고 다니는 도로 한 복판에, 네가 이렇게 쓰러져 있으면 어떻게 하니!,”
쯧 쯧, 너무나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기가 막힌다.
어미 개다. 엄마 개다. 양쪽 젖통들이 팅팅 불어터질 대로 불어터져 있는 새끼를 데린 어미 개다.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지 못하다보니, 젖통들이 어찌나 팅팅 불어터져 있는지, 축축 늘어진 젖통들이 마치 어미젖소를 방불케 한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길 한 복판에 쓰러져 버렸니!, 새끼들을 찾아 헤매다가, 혹시 쌩쌩! 지나다니는 자동차에 치이기라도 했니!, 아니면 이 추운날씨에 새끼들을 찾아다니느라, 아무것도 먹지를 못해서 그냥 길바닥에 쓰러져 버린 것이니!, 그래도 그렇지!, 이왕 없어진 새끼들을 그렇게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이니!, 어디, 너 뿐이니!, 너 뿐이 아니라, 다른 어미 개들도 다들 마찬가지잖니!,”
“어디 어미 개들뿐이니, 모든 짐승이란 짐승치고 새끼를 잃지 않은 짐승이 어디 있니, 짐승뿐이 아니라,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치고, 누구하나 제대로 목숨을 부지한 사람이 누가 있니,”
“그런데 그래 어쩌자고 새끼를 찾는 데만 정신이 빠져가지고 이 지경이 됐니, 네가 죽고 나면, 너까지 숨을 거두고 나면, 이 마을엔 누가 남니!, 너마저 이렇게 목숨을 거두고 나면, 이 마을엔, 짐승이 남니, 사람이 하나 남니,”
“이 추운 겨울에, 이 추운 겨울에 따끈따끈한 네 몸이 이렇게 식어가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으니?”
“아직은 그래도 체온이라도 따끈따끈하게 남아있으니까, 어떻게 눈을 좀 떠봐, 야, 녀석아, 눈을 좀 떠 보래도, 너 하나야, 이 마을에선 생명체라곤 너 하나야, 너 하나라도 목숨을 건지는 자가 있어야 되잖니, 싸늘하게 체온이 식기 전에, 어서 정신을 차려 보래도! 눈을 좀 떠보래도!,”
“끝내 가니, 끝내 가는 거니, 너마져 식니! 이 추운 겨울에 싸늘하게 식니!,”
“이 전쟁 통에 너 하나라도 어떻게 생명을 부지해 보아야지, 그래 끝내 가니, 끝내 싸느랗게 식니!?”
주인은 어디로 갔니?
주인은 어디로 갔기에 네 혼자서 땅바닥에 뒹굴고 그러니, 주인이 어디로 갔기에 땅바닥에 처박힌 체 꽝꽝 얼어붙니?
방바닥이다. 방바닥에 젖은 양말 한 켤레가 나뒹굴고 있다. 빨아 넌지 얼마 안 되는 모양이다. 아직은 젖은 양말이다. 두툼한 겨울양말 한 켤레가 빨래집게에 꼭 집힌 체 방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지금은 밖이 워낙 꽝꽝 얼어붙는 계절이다 보니, 주인이 양말을 빨아서 밖에다 널지 못하고, 방에다 널어둔 모양이다. 방에 널어두었던 젖은 양말이 주인을 잃은 체, 땅바닥에 나 뒹굴고 있다. 방바닥 책상 앞에 아무렇게나 구겨진 체 나뒹굴고 있다.
“아직 물기가 다 마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빤지 하루 이틀 밖에 안 된 것 같은데, 고 사이에, 고 사이에, 고 하루 이틀 사이에, 이 땅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니,”
“아무리 전쟁 통이라 해도 그렇지, 마을이든, 들판이든, 사람의 그림자하나 찾아볼 수가 없으니, 그래, 고 하루 이틀 사이에, 이 땅에 무슨 일이 잃어난 것이니,”
“무슨 일이 잃어났기에, 그 많은 사람들을, 이렇게 까지 깨끗이 싹 휩쓸어 가 버린 것이니!?”
“이 추운 겨울에, 이 추운 겨울에, 흰 눈이 하얗게 덮인 이 추운 겨울에, 그 많은 사람들을 그림자하나 남기지 않고, 이렇게 까지 모조리 싹 휩쓸어가 버릴 수가 있는 것이니!?”
“전쟁이란 그런 것이니!?”